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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약조와 한반도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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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약조와 한반도 평화
  • 윤관 기자
  • 승인 2018.06.24 1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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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의 화해는 평화로 가는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평화 그 자체는 아니다”

(시사캐스트, SISACAST= 윤관 기자)

기유약조는 임진왜란의 참화를 겪은 조선과 일본의 화해가 이뤄진 역사다. 기유조약의 주역은 광해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기유약조는 조선과 일본의 최고지도자가 교체된 시기에 맺어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1609년은 광해군이 집권에 성공한 시점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 무능한 군주 선조를 대신해 분조를 이끌며 왜군과 맞선 영웅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광해군을 배신하고자 했고, 왕위를 어린 영창대군에게 물려주고자 했다. 광해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북인의 지원을 받아 마침내 집권에 성공했다. 광해군의 대권 장악 과정은 험로 그 자체였다.
 
마침 일본이 끈질지게 국교 정상화를 요구했다. 광해군은 일본이 왜란을 일으켜 수많은 백성을 해친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가진 지정학적 중요성을 더 중시했다. 당시 조선은 북으로는 명과 여진, 남으로는 일본이 외교 상대국이었다.
 
당시 대륙은 여진의 발호로 중원의 패자를 놓고 일전을 앞 둔 시점이었다. 광해군은 북방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新정권 에도막부와 새로운 갈등을 원하지 않았고, 일본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을 잘 인식해 일본의 요구를 승낙했다.
 
일본도 왜란 이후 극심한 정치적 격변기를 겪었다. 왜란의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전국의 다이묘들은 차기 대권을 위해 동군과 서군으로 분열돼 서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펼친다. 승자는 反히데요시 진영인 동군을 이끌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이에야스는 쇼군에 올라 에도막부를 창시했다. 당초 왜란에 소극적이었던 이에야스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했고, 해법의 중심에 조선과의 국교정상화를 뒀다. 조선도 왜란때 승병장으로 명성을 떨친 사명대사를 파견했고, 대사는 이에야스와의 담판으로 1500여명의 조선인 포로를 데리고 귀국하는 성과를 냈다.
 
조선과 일본은 대화가 통하자 국교 정상화에 나섰다. 마침내 1609년 기유약조가 채결됐다. 광해군은 동래부의 부산포에 왜관을 설치했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무역을 허용했다. 왜란이 끝난 지 얼마 안 지난 시점의 민심을 고려해 일본 측에 제한을 가하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었다.
 
일본은 기유약조로 숨통이 열렸다. 조선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됐고, 에도 막부는 쇼군 교체기 때마다 조선통신사를 통해 정권의 권위를 인정받게 됐다. 임진왜란으로 형성된 적대관계는 기유약조가 해소했다. 하지만 일본은 311년 후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2018년, 남북대화의 문이 열렸다.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사상 최초의 미북정상회담 개최는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지구상 마지막 냉전지역인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 것 같다는 희망도 생겼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만큼 한반도 비핵화 이행 의지를 보여줬는지는 아직 의문이다. 광해군도 승병장 출신의 사명대사를 전권대사로 삼아 이에야스의 의지를 확인했다. 왜적과 싸워본 사명대사가 그 누구보다도 적장의 의지를 잘 파악하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적과의 화해는 평화로 가는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평화 그 자체는 아니다. 419년 전 기유약조를 맺었을 때 일본이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 것이라고 상상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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