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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천재… 비운의 스타 한국야구 이끈 ‘풍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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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천재… 비운의 스타 한국야구 이끈 ‘풍운아’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8.03.27 1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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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팀 우리 히어로즈 단장 박노준

초등학교때 야구 시작 “항상 최고선수”
투수-타자-외야수등 모든포지션 소화
주위선 “얄밉도록 야구 잘한다” 말들어
70년대 선린상고 이끈 고교야구의 전설

시합때마다 여고생들 수업도 빠지고 관람
고교야구 ‘최초의 오빠부대’ 만든 주역

82년 세계야구선수권 우승 이끈 장본인
프로입단후 어깨부상·인대파열등 불운
신생 야구단 단장맡아 다시 시험대올라

필자에게 박노준은 세 가지 의미로 기억되고 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던 1982년 ‘박노준이 야구를 진짜 잘 한다’는 동네 형들의 칭송이 그 첫째다. 박노준의 얼굴도 모르던 필자에게 박노준은 신비한 존재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둘째는 프로에서의 박노준의 모습이다. 결과는 참 시시했다. 야구를 진짜 잘 한다던 박노준은 정작 프로에 와서 평범한 선수로 오래지 않은 선수생활을 하고 쓸쓸히 사라졌다. 처음부터 평범한 선수였다면 그다지 나쁘지도 않은 성적이었겠지만 박노준의 이름값에는 전혀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넥타이를 맨 야구인 박노준이다. 박노준은 현역에서 은퇴한 후 야구해설가로 선수시절보다 능력을 인정받았고 올해 첫 선을 보이는 신생팀 ‘우리 히어로즈’의 단장을 맡아 팀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박노준이 끝까지 야구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박노준은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직전까지 한국 최고의 인기스포츠였던 고교야구의 절정기를 이끈 신화적 존재다.

1979년 4월 25일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에서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가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이 이끌던 부산상고를 15 대1로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선린상고의 4번 타자 겸 에이스는 윤석환이었지만 MVP는 놀랍게도 신입생 박노준이었다.

경기 전 부산상고의 절대 우위가 점쳐졌다. 하지만 1학년 박노준, 김건우는 ‘그냥 1학년’이 아니었다. 특히 박노준은 1976년 리틀야구에서 이전까지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대만을 2 대0으로 꺾었던 투타의 주역으로 일찌감치 천재성을 인정받은 유망주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2달도 안 된 상황에서 대통령배 MVP를 수상하며 화려하게 고교야구에 입성한 박노준은 2학년이 된 후 청룡기와 황금사자기 우승을 이끌었고, 3학년 때는 메이저대회에서 2차례의 준우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투타에서 일찌감치 스타성을 인정받았던 박노준은 ‘고교야구 최초의 오빠부대’를 이끌고 다니며 야구붐을 이끌었다. 박노준이 등장하는 경기장엔 여고생들이 수업도 빠뜨리고 몰려들곤 했다. 당시로선 진풍경이었다.

1980년 10월 5일은 박노준의 이름을 야구팬들에게 강인하게 각인시킨 날이다. 박노준은 선동렬이 이끌던 광주일고와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맞붙었다. 5회부터 마운드에 올라 2안타 1실점으로 호투한 박노준은 3대2로 앞선 8회말 2사 1루에서 타석에 나와 선동렬로부터 커다란 홈런을 뽑아냈다.

앞서 박노준은 4회말 2사후 안타로 진루해 1대1 동점을 만들었고, 6회에도 선동렬의 4구를 통타해 2대2 동점을 만든바 있다. 선동렬이 선수생활을 통틀어 이처럼 한 선수에게 당한 일은 없을 것이다. 

박노준을 불세출의 스타로 만든 사건은 1981년 8월 26일, 성준과 유중일이 이끌던 경북고와 맞붙은 봉황대기 결승전이었다. 김건우를 앞세워 1회초 무사 2,3루의 위기를 넘긴 선린상고는 1회말 2사 만루에서 6번 이경재의 좌전안타에 홈 악송구까지 겹쳐 3점을 뽑아냈다.

하지만 2루 주자로 홈을 향해 슬라이딩을 시도하던 박노준은 왼발이 꼬여버렸다. 고교야구 팬들 중에는 이 장면을 지금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복숭아뼈 2개가 나가고 인대가 끊어진 박노준은 급히 한국병원에 후송돼, 나머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선린상고는 6회 1점을 추가했지만 경북고에 4회와 6회 각각 1점씩 내줬다. 3회 이후 어깨통증을 호소하던 김건우는 결국 4회를 넘기지 못하고 스스로 내려왔고, 구원투수 이바오로가 8회 고비를 넘지 못하고 4점을 내줘 패배를 감수해야 했다.

“선린상고 팀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하는 것은 그가 빠진 선린상고의 게임결과를 보면 불을 보듯 명약하다. 뛰어난 왼팔투수로, 그리고 날카롭고 정확한 강타자로서 수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박노준은 올 들어 이번까지 세 번이나 결승에 진출했으면서도 끝내 정상을 놓친 것이 통분해서 더욱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는지 모른다.”

당시 신문보도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박노준은 이 경기를 계기로 ‘비운의 스타’라는 별명을 얻었다.

워낙 출중한 스타였지만 혹사도 엄청났다. 고려대 1년 선배였던 ‘불세출의 투수’ 선동렬이 이런저런 이유로 몸 관리를 했던데 반해 박노준은 국가대표팀과 고려대에서 우직하게 던졌다. 1986년 서울지역 1순위 지명을 확보한 OB(현 두산) 베어스는 당연히 박노준을 선택했다.

이미 어깨가 망가진 박노준은 투수를 포기하고 역대 타자 최고액인 계약금 5000만원, 연봉 1200만원에 계약했지만 팀 사정상 스프링캠프에서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실제 그해 시범경기에서 인상적인 투구를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규리그는 달랐다. 시범경기를 포함해 과거 그가 보여줬던 강렬한 그라운드 지배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소속팀 OB는 4위에 그쳤다.

프로 첫해 5승 6패 7세이브 방어율 2.28의 성적을 남겼다. 그다지 마운드에 자주 등판하지도 못했다. 명성에 어울리지 않은 성적이었다.

항상 박노준의 그늘에 가려있던 김건우는 18승 6패 방어율 1.81로 신인왕에 올랐고, 같은 왼손잡이었던 삼성 라이온즈의 성준도 15승 5패 2세이브 방어율 2.36으로 왼손투수 계보를 이어갔다..

하지만 투수 박노준은 87년 1패, 88년 3이닝 6실점만 추가한 투수 인생을 마감했다. 프로에서의 박노준을 투수로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고 박노준의 방망이는 살아 있었다.

본격적으로 방망이를 잡은 1989년 3할에 육박하는 타율(0.298)에 25도루를 기록한 박노준은 90년 0.249로 부진했다가 91년 다시 3할에 육박하는 기록(0.293)을 올렸지만 그해 12월 투수 이광우와 전격 트레이드되면서 해태로 소속팀을 옮긴 뒤 이듬해 다시 쌍방울 레이더스로 현금 트레이드됐다.

아마에서 누리던 영광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처우였다. 타율에 비해 타점이나 홈런 등 영양가가 부족했다.

박노준은 94년 타율 0.303에 43도루를 기록하며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지만 그 때뿐이었다.  96년 0.345의 ‘고타율’은 부상 등으로 52경기에서 기록한 규정타석 미달의 성적이었다.

97년 0.187에 처참한 성적으로 그라운드를 떠나고 말았다. 통산타율 0.262에 28홈런, 154도루가 그가 12년간 프로무대에 남긴 전부였다. 고교야구 천재는 오간데 없는 듯했다.

프로야구 현역에서 은퇴한 후 박노준은 야구 해설가로 제2의 야구인생을 살았다. 야구해설가로는 하일성, 허구연에 버금가는 지지를 받으며 인기를 누렸다. 박노준은 신생팀 우리 히어로즈의 초대 단장을 맡아 야구팀 경영자로 시험대에 섰다. 우선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프로야구 제8구단 우리 히어로즈의 단장 박노준은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한 센테니얼 단장에 부임한 이래 김시진 현대 감독과 계약을 포기했고, 노장급 선수들과 계속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

엄청난 규모의 적자에 허덕이는 프로야구판을 개혁하기 위해 ‘악역’을 자임했다는 평에서 하일성 KBO 사무총장과의 인연으로 ‘벼락출세’를 했다는 비꼬는 소리까지 나온다.

현대를 이끌어온 고참급 억대연봉선수들에게 최대 80%까지 삭감폭을 제시한 이장석 센테니얼 대표는 “대폭삭감이 제시된 노장선수는 그만큼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과거 현대의 관리시스템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또 “프로야구의 개혁은 꼭 필요하다”며 “개혁을 하려면 반발이 있기 마련이고 그 손가락질은 내가 받겠다”고 했다.

말은 이 대표가 했지만 총대는 박노준이 매고 있다. 지난 2004년 최고연봉자(7억4000만원)로 현대에서만 16년간 선수생활을 했던 정민태가 연봉 8000만원을 제시 받은 뒤 4일 자유계약선수(FA)로 풀렸다.
 
프로야구계에서 일찍이 없었던 칼날을 박노준이 휘두르고 있다.  송지만(6억원), 김수경(4억원), 이숭용(3억5000만원), 김동수(3억원), 전준호(2억5000만원) 등 간판급 고액연봉자들이 줄줄이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일부 구단관계자들은 “박 단장과 센테니얼의 과감한 결단에 응원하고픈 심정”이라며 “아무도 책임지려하지 않은 상황에서 선수출신 박 단장이 나서 수익구조를 다양화하고 연봉을 현실화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평한 것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현재의 마찰은 과도기의 불가피한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다.

야구팬들도 박노준 신임 단장에 대해 찬반 양론으로 갈라져 있다. 올해 우리 히어로즈의 성적에 따라 박노준의 야구인생도 명암이 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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